문화·교육 그 님들이 영천 벌에 뿌린 뜨거운 피가 없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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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38>
그 님들 없었더라면 / 낯선 이곳 긴 내 벌 / 뜨거운 피 기꺼이 뿌린 / 그 님들 그 옹골찬 넋 없었더라면 // 그 저주 받은 것처럼 처절했던 / 1950년 9월 2일부터 13일까지 / 아파하고 슬퍼할 틈도 없이 / 뺏기고 빼앗는 아수라장 / / 뉴 코리아 플랜 New Korea Plan / 들어보기나 했나 / 한반도 포기하고 / 62만명으로 사모아섬에 / 타이완처럼 피난 정부 세운다는 것 / / 피로 지킨 그 님들의 얼 / 있었기에 뺏긴 영천 다시 찾고 / 영천 회복했기에 인천상륙 이뤄냈고 / 인천상륙 있었기에 자유 지켰다 / 그 님들이 피로 지키러 했던 그 자유 / 그 님들 없었더라면 / 춥다 뜨겁다 배 아프다 / 투덜투덜 거리며 / 살아갈 수 있을까 / / 이렇게 많은 억울한 죽음 / 어이할텐가 /
홍찬선 시인의 <영천 대첩>이라는 시다. 시인이 이야기 했듯이 만약에 낙동강 방어선에서 영천이 무너졌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남태평양 푸른 물에 무심히 던진듯 덩그라니 솟은 사모아 섬에 선택받은 일부가 거기 야자수 그늘 아래 둘러 앉아 조국을 그리워하며 아픈 한숨을 내뿜고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미군으로 구성된 유엔군. 막상 한반도에 도착해 보니 전쟁 상태는 참담했다. 막막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과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한국군. 이 전세를 역전시킬 희망도, 방법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갓 세워진 신생국 대한민국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세워진 플랜 B가 New Korea Plan이다.
이는 정부 인사와 사회의 지도급 인사, 고위 장병 가족, 몇 개 사단, 그리고 정보 수집에 써 먹을 수 있는 똘똘한 포로 약간, 등 약 62만명의 한인을 선발, 서사모아 군도에 있는 두 섬, 사비아와 우폴루에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계획의 실천 여부를 영천 전투의
승패에 걸었다.
미 제8군 사령관인 워커 (Walton H. Walker) 중장은 1950년 8월 4일부로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다. 동해안의 영덕에서 시작하여 낙동강을 따라 마산 서쪽의 산악지대에 이르는 240km의 전선으로, Walker Line으로도 불린다. 북한군은 8월과 9월 두 차례 총공세를 펼쳤다. 그 중 8월 공세는 부산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방어에 실패했다.
그리고 펼쳐진 9월 공세가 영천지구 전투이다. 1950년 9월 5일, 북한군 제 15대 사단은 5개 연대와 전차를 앞세워 국군에게 돌진했다. 1950년 8월 중순부터 약 한 달 간 영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보현산 지구, 신녕 조림산 자구와 화산 지구, 그리고 영천 지구 전투이다. 그 중 낙동강 방어선의 마지막 보루, 영천지구 전투는 앞으로 국군이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줄 중요한 전투였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사통팔달의 지역으로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영천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다면 그들은 곧장 대구로 진출,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에게 타격을 주면서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무너지게 되고. 그들이 경주로 진출한다면 부산이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곡사포, 대전차포를 갖춘 국군 7개 연대 병력은 수차례의 공방전 끝에 적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시켜 승리를 거둠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거뜬히 지켜냈다. 국군은 3,799명의 북한군을 사살하고 309명의 포로를 생포하면서 전차, 장갑차, 화포 등 다랑과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둔다.
이에 비해 국군은 전사자 29명, 부상자 148명, 실종 48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이를 기리는 전적비의 비문은 이렇게 적혔다. <조국의 운명을 건 갈림길에 적군의 무리들이 영천벌을 넘나드니 인과 철이 용용하는 전쟁터로 너, 나 뛰쳐나가 둑을 막아 내 고장을 지켰다. 저~ 기룡산은 이~ 금호간은 너의 용자를 길이 간직하리>
미 제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와서 낙동강을 따라 Walker Line을 구축한 워커 중장. 지휘관들에게 작전 계획을 전달하면서 그가 한국군에게 전한 말은 이렇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만은 지켜낼 것이다> 이어서 미군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더 이상 물러 설 곳도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버티거나 죽어라 (Stand or Die)>
2차 대전 때는 패튼이 지휘하는 제3야전군 산하의 20군단장으로 복무했다. 이 때 그의 군단은 <유령 군단>. 그 특유의 민첩한 기동성 때문에 얻어진 별명이었다. 낙동강 전투에서도 전선을 종횡무진 누비며 지휘하는 바람에 턱없이 부족한 병력을 이리 막고 저리 막아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 12월 23일, 한국전에 참전한 아들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식을 참관하기 위해 가던 중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숨진다. 그는 대장으로 추서되어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이 때 맥아더 장군은 샘에게 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가라 했으나 셈은 전우들을 두고 어찌… 라며 망서렸고 이에 맥아더는 ‘명령이다’라며 보냈다고. 1977년에는 아들 샘 워커도 대장으로 승진되는 바람에 미 육군사상 최초로 부자 4성장군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한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워커힐이 세워졌다. 그 님들의 그 옹골찬 넋은 우리를 언제나 숙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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