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대대적인 귀국 환영 직후 좌우세력 통합에 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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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21>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꿈이 현실로 드러난 날이다. 그 꿈은 지긋지긋한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 그래서 이승만은 귀국을 서두르지만 미국에서 여권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미 국무부는 막판에 전쟁에 끼어들어 승전국이 된 소련과의 협상에 방해될 것이 뻔한 이승만을 쉽게 내보낼 수 없었다. 그가 철저한 반소. 반공주의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최후 수단으로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에게 전보를 친다. <우리는 공동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피값과 막대한 전쟁 비용의 댓가로 미군만의 단독점령이어야 한다> <왜 우리가 소련으로 하여금 한반도에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여 전쟁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이것이 통했다. 그 역시 뼛속부터 반공, 반소주의였기 때문이다.
맥어더의 도움으로 미국을 떠나 우선 도꾜에 들렀다. 마침 그곳에 온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중장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방된지 만 두달 후인 10월 16일, 맥아더가 내어준 전용기를 타고 귀국했다. 다시 밟아보는 그리운 고향 땅을 밟은지 나흘째인 10월 20일 미군정은 대대적인 귀국 환영식으로 이승만을 맞이했다.
<복사골 옛 벗님네들 연기처럼 흩어져 / 바람처럼 먼지처럼 흘러간 50년 / 모두 변해버린 옛터에 흰머리로 돌아와 / 옛 사당 앞 비낀 햇살에 눈물 짓다니>
고달펐던 타향살이 33년을 청산하고 귀향하자마자 찾은 남산골 도동집 옛터를 바라보며 지은 한시다. 어려서 또래들과 몰려가 글공부하던 서당도 있고 봄되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복사꽃이 만발한 복숭아 밭도 있는 우수현 남녁에서 자랐다하여 호가 우남이었다지.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8일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쑥대밭이 된 일본. 패전이 눈 앞인데 소련은 거기다 대고 8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그 날로 만주로 들어가 일본 관동군을 섬멸하고 참전 6일만에 한반도로 향한다. 이에 미국은 당황한다. 미군은 600마일 떨어진 오끼나와에 있거나 2천마일 떨어진 필리핀에 있는데 이리 급하게 들어오다니. 그래서 급한김에 임시로 서울이 남쪽으로 포함되도록 적당한 선을 긋고 남하하는 소련에게 서로 그 선을 넘지 말자고 합의한다. 그것이 38선.
8월 27일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해방군임을 자처하는 소련군이 이북에 병력을 배치하고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육군 24군단이 남한으로 이동하며 한반도에 군정이 시작된다. 이렇게 일본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해 자기들 맘대로 스윽 그어진 임시 분계선, 38선은 군정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독립된 정부가 세워진 후에도 지워질 줄 모르고 더욱 짙고 굵게 덧칠되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이렇게 긴 세월이 지나고 보니 우여곡절 끝에 독립된 정부가 세워졌다고 간단하게 표현해도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가 세워지지까지 그 3년간의 혼란은 우여곡절이 아니라 질풍노도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지도자들이 모여서 어떤 형태의 독립국을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며 준비하기도 전에 갑자기 해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좌익 세력이 정부수립을 위해 먼저 움직였다. 해방 바로 다음날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9월 6일 급진 공산주의자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그런데 선포한지 8일만에 발표된 조각 명단에 뜻밖에도 아직 미국에 발묶여 있는 이승만이 끼어 있었다. 그것도 주석으로 추대된 것.
물론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살짝 의아해 진다. 아마도 그 당시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정치 철학이나 이념을 떠나서 그냥 30여년간 해외에서 활동한 애국자로 존경했나보다.
좌익세력의 주석으로서가 아니라 미군정의 수장 하지중장으로부터 민족의 영웅으로 소개되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이승만은 지금은 좌익 우익을 따질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민족 대단결에 의한 자주 독립을 쟁취할 전무후무한 기회임을 강조했다. 그런 후 좌우 65개의 정당을 대표하는 200여명의 지도자들을 조선 호텔에 초청,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앙회)라는 통합기구를 결성했다.
근본 이념이 다른 박헌영에게는 <… 나를 주석으로 선정하였다하니, 나를 이만치 생각해 준 것은 감사하나… 나는 중경임시정부의 한사람입니다>라면서 주석직을 사양하면서 공산당과의 공식 결별을 선언했다. 그래서 좌익 우익을 함께 어우르려는 독촉중앙회의 노력은 일단 좌절된다.
그해 11월에 김구를 중심으로하는 임시정부 요인들도 속속 귀국했다. 한달 먼저 귀국하여 하지중장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이승만과는 달리 그의 귀향은 아주 단촐했다.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미군 몇 사람뿐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닌 태극기를 흔드는데 그 마저도 미군이 말리더군요. 흔들지말라고.> 그 당시 김구의 비서엿던 윤경빈씨의 쓸쓸한 회상이다.
오자마자 자신의 정치 기반 다지기에 온 힘을 쏟고 있던 이승만은 김구를 하지 중장에게 소개하며 앞으로 동지로서 힘을 합칠 것을 기대했다. 이승만은 김구뿐 아니라 여운형, 송진우 등 온건 좌익 지도자들과도 만남을 이어갔다.
하지만 한발 늦게 귀국한 김구의 생각은 달랐다. 이승만의 독촉중앙회가 추진하는 좌우 통합 노선을 임시정부를 통하여 독자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이승만을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이승만에게 등을 돌리고 인민공화국측과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자유신문에 <망명정부가 일종의 임시정부인 것처럼 경주하고 있는 것은 분열을 조장하는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 김구가 내민 손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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