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북한의 남침 야욕에 자신감을 심어 준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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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31]
남한 주둔했던 미군은 1948년 9월부터 철수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6월에 고문단 495명만 남겨두고 모두 한국을 떠났다. 같은 해 12월, 소련군을 떠나 보낸 김일성은 이듬해 4월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인 사단을 보내달라고 요청. 이에 모택동은 조선인으로 구성된2개 사단을 장비까지 딸려 보낸다.
이들은 1949년 7월부터 북한으로 유입, 10개 연대로 재편성된다. 이로써 북한의 인민군은 남한의 국군보다 약 2배 정도로 증강된다.
북한이 더 많이 가진 것은 병력만이 아니다. 도표에서 보는대로 남한에는 탱크나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 ‘북한에 가서 봤더니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이 남침하면 남한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던 김구의 위협적인 발언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미군은 이런 상황에서 철수를 감행했는가? 미국은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군사력을 대폭 감소시킨다. 1945년에 미국의 국방비는 830억불에 1,200만에 육박는 병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전 후 불과 2년만에 국방비는 128억불, 병력은 146만명으로 격하게 줄였다. 대신 그들에게는 성능 좋은 핵무기가 미국의 품위를 책임지고 있기에 세계 패권국으로 발돋움하는데에 군비감축 같은 것이 문제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당시 미국은 이념 대립을 전쟁이 아닌 경제나 정치적 시각으로 본 것도 군축의 한 이유가 되겠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딘 에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은 전국 신문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동안 미국이 무엇을 해왔고 앞으로 또 국제분쟁이 일어날 경우 미 육군이 즉시 출동,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한 것이다. 극동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토 야욕이 드러났을 때 미국이 도울 수 있는 한계선을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이 선 밖에 있는 것이 문제였다. 선 안에 있는 섬 중에서 알류샨 열도는 미국령이고 필리핀은 오랜 동안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방금 독립한 신생국이다. 그리고 일본은 연합군 점령하에 있는 패전국이고.
그 당시 유엔은 미국의 거수기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어쨋든 한국은 그 UN에 의해 독립국으로 인정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섞여 있어서 문제지만 자체 군인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 한국군에게 장비를 들여와 무장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도 해 주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은 군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 국가의 침범을 받을 경우, 우선 자체 국군으로 싸우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돕겠다는 내용이다.
이에 정부 예산 일체를 미국 원조에 의존하던 이승만은 형식적으로나마 감사의 메시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고 외무장관 역시 환영의 담화문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드디어 기회는 왔다 싶은 김일성은 즉시 스탈린에게 달려가 자신의 남침 계획을 보이며 승인해 줄 것을 졸랐고 스탈린은 승인해 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남침 야욕을 부추길 요소들은 이렇게 국제적으로 드러난 문제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얼마던지 찾을 수 있다. 대한민국이 독립된 국가임을 선포한 1948년 8월 15일을 전후해서 터진 일들이 많다. 몇 주 전에 살펴본대로 그 해 4월에는 남로당의 사주로 제주 폭동이 일어났고 10월에는 여순 병란 등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산당원들을 소탕해야 했다.
소탕해야 할 대상은 또 있다. 친일 청산. 1948년 9월에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제정한 국회는 반민특위를 구성하고 특별경찰대를 설치, 이듬해부터 소위 친일파들을 법정에 세우기 시작했다. 이광수, 최남선 등 당대 최고 지성들이 있는가 하면 박흥식, 김연수 등 최고 기업인들도 차례로 법정에 서게 된다.
이들 중에서도 최악의 친일파는 노덕술 (1899-1968). 그는 박헌영과 손잡은 공산 조직 경성Com Group을 일망타진한 공으로 지금의 총경에 해당하는 경시가 된 친일 조선인 경찰이었다. 뼛속까지 반공인 이대통령에게는 그가 친일하던 과오보다는 100여명이 넘는 공산 조직을 일망타진한 경찰관으로서의 공이 더 커 보였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그를 구명하기 위한 담화문을 발표한다.
<… 지금 반란분자와 파괴분자가 처처에서 살인, 방화하여 인명이 위태하며, 지하공작이 긴밀한 이 때 경관의 기술과 진력이 아니면 사태 수습이 어려울 것인데, 기왕에 죄범이 있는 자라도 아직 유보하고 목하의 위기를 정돈시켜 인명을 구제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저혜로운 정책이 아닐까한다. 만일 왕사를 먼저 징계하여 목전의 난국을 만든다면 이것은 정부에서나 민중이 허락치 않을 것이므로 경찰의 기술자들을 아직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며, 따라서 반공 투쟁이 격렬할 때에 경찰의 기술자들이 직책을 다하여 치안에 공효가 많을 때에는 속죄….>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1950년부터 군에 입대하여 헌병으로 활약했다.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 재산 처리 문제도 이 대통령이 풀어야 할 숙제였다. 본래 미군정이 관리했지만 이들은 한국을 떠나면서 <한미간의 재산 이양에 관한 최초 협정>에 따라 모든 재산을 한국 정부에 이양한 것. 국회는 북한에서 행했던 것 처럼 이를 국유화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 대통령은 민영화를 고집했다.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 연고자나 종업원 또는 농지개혁에 참여한 지주들에게 불하 우선권을 주고 처리했다. 이로써 민간 주도 시장경제 원칙이 준수되었고.
이에 더하여 성공적인 농지개혁으로 건국 2년을 넘기면서 점차 안정 되어가는 남한을 보라보는 김일성은 초조했다. 대한민국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얼른 적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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