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새장골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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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골의 여름”
(정만진) (2018 텍사스중앙일보 예술 대전 최우수상)
내 고향 새장골은 마을 모양새가 새장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초가집과 기와집 3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정답게 살던 마을 입구에는 백 년도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다. 마을회관이 없던 시절, 나무가 만들어 준 시원한 그늘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해주었다. 그 나무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 연신내 냇가에 있었는데, 제법 큰 평상이 놓여 있어 여름에 들일을 하시던 어른들이 잠시 쉬며 땀을 식히기도 하고, 새참이나 점심을 드시던 장소이기도 했다. 우리 개구쟁이들도 항상 느티나무 주변을 맴돌며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하곤 했다.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은 문산으로 가는 신작로인 국도 1호선과 연신내가 만나는 곳에 있던 큰 다리 근처이며 오래전에 복개한 후 도로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연신내를 볼 수 없어 아쉽다. 새장골은 연신내역에서 북한산 자락으로 20분 정도 올라가는 곳에 있었다. 항상 맑은 물이 넉넉하게 흐르는 내였기에 한여름 더울 때는 친구들이 모여 돌을 주워다 연신내를 막아 풀장을 만든 후 발가벗고 헤엄을 치면서 밤낮없이 물놀이를 하고 놀았다. 어른들도 뙤약볕에서 온종일 힘든 농사일을 마치면 이곳에서 멱을 감고 더위를 식혔다.
둑을 쌓으면 물고기가 많이 모여들어 손으로 붕어와 가재를 잡았다. 그때는 그물이 흔치 않아서 싸리나무로 엮은 삼태기로 잡기도 했는데, 그물보다 무겁고 엉성해서 물고기를 놓쳤던 기억이 난다. 물놀이를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다이빙을 한다고 냇가에서 호기롭게 뛰어들었다가 머리가 바닥에 부딪혀 깨지기도 하고, 흘러내려 온 유리 조각이나 날카로운 금속 조각들을 밟아 발바닥에 상처를 입고 고생한 친구들도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시내버스도 주택지 개발을 막 시작한 불광동까지만 운행을 하던 시절에 녹번동에 있는 은평국민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가려면 불광동 고개와 녹번동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여름철 오후 하굣길은 나병 환자들이 어린이를 잡아간다는 풍문 때문에 늘 뛰어서 집에 오느라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풀장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아지트였다. 부모님들한테 어렵게 얻어 낸 용돈이나 모아둔 빈 병과 바꿔 먹던 아이스케키의 시원한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요즘 나오는 고급스러운 아이스크림과 비교하면 불량식품이겠지만 더위를 식혀주던 그 맛은 참으로 일품이었다.
여름밤이면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친구들과 같이 사과와 자두랑 복숭아 서리를 하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그날의 복장은 좀 넉넉한 러닝셔츠를 입은 다음 허리끈을 바짝 동여맨 차림이었다. 그래야만 러닝셔츠 속으로 집어넣은 과일들이 밑으로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과와 자두는 맨살에 닿아도 문제가 없지만, 복숭아는 털이 있어서 러닝셔츠를 털고 헤엄을 치면서 목욕을 여러 번 해도 가려운 것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처럼 한두 번은 성공했지만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여러 번 다시 들어가다 보니 결국에는 주인한테 잡혀서 치도곤을 당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너무 죄송한데 철없던 시절에는 서리가 그렇게 나쁜 놀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그 시절에는 사람이 죽으면 마을 뒷산 장지까지 상여로 모시고 갔다. 상여는 마을의 젊은이들이 메고 갔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에 과수원 주인아저씨가 죽어도 절대로 상여를 매주지 말자고 다짐하곤 했다. 60 년이 지난 지금의 장례문화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순수하고 황당한 복수심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갈현동이라 불리는 박석고개로 넘어가던 뒷산 꼭대기에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셨던 서낭당과 꽃상여를 보관하던 집이 있었다. 정초가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대동굿을 드리곤 했는데, 큰 소나무들이 빽빽한 그곳은 음침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한낮에도 웬만큼 담이 크지 않으면 지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여름밤에는 중학교에 다니는 형들이 우리들의 담력을 길러 준다는 구실로 그곳으로 데리고 가서 술래잡기도 시키고, 서낭당을 돌아오는 경주도 시켰는데 영화 '월하의 공동묘지'를 보는 것만큼 무서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 아이들은 온통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포장해서 맨땅을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주위 환경이 예전보다 나아졌는지는 몰라도 정서적으로는 옛날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학교가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집과 가까운 곳에 있고 School Bus를 이용하기 때문에 등 하교는 편할지 모르겠으나 흙을 밟고 걷는 추억을 못만들어 아쉽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배가 고프면 남의 밭에서 무를 뽑아먹고, 오이나 토마토도 따 먹으면서 친구들과 정답게 다니던 하굣길 추억이 그립다.
은퇴 후 아내를 도와 네 살짜리 손자와 10개월짜리 손녀를 돌봐주고 있다. 지난날 일을 하느라 자식들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정을 쏟고 있다. 손주들이 좀 더 크면 나와는 달리 대형 워터파크에서 멋진 슬라이드를 타며 신나게 물놀이를 할 것이다. 하지만 주립공원State Park 오솔길도 걸어보고 계곡에 맨발로 들어가서 가재도 잡으면서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추억을 들려주며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고 싶다.
내 나이 올해 칠순이 되었다. 지나온 삶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짧을 것이다. 휴스턴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산 지 14년이 흘렀는데도, 60년 전 연신내에서 발가벗고 물장구치며 신나게 뛰어놀던 동심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고향의 정겨운 모습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눈을 감으면 어제 일처럼 펼쳐지는 내 고향 새장골의 여름 추억들, 그 중심에 서 있던 개구쟁이 불알친구들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정만진 수필가
수필가, 1949년 서울 출생 / 2004년 휴스턴 이주 / 미주가톨릭문인협회원,
미주한국문인협회원, 달라스한인문학회 부회장 / (전) 텍사스 중앙일보
문학칼럼니스트 / 2019년 제58회 <에세이문예사> 신인문학상 수상‘추억
속의 한강 에어쇼’ / 2018년 텍사스 중앙일보 예술대전 수필 최우수상‘
새장골의 여름’/ 2019년 고희기념 자전 에세이 <LNG와 함께한 山水有情
人間有愛>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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