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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신탁과 반탁의 충돌로 더욱 달궈진 좌·우익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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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22>


1945년 12월16일,  미국의 Byrnes  국무장관과 영국의 Bevin 외무상, 그리고  소련의 Molotov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였다. 모인 목적은  2차 대전 후 처리되어야 할   문제들을 논의하여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  모두 7가지 의제 중 한국 문제는 3번 째로 논의되었다. 


여기서 결정된 것이 38선을 분계선으로 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안이다.   기간은 5년간. 그런데 이 5년을 언제 시작하는가에서 두 나라의 의견이 갈린다. 미국은 우선 5년간 신탁통치를 통해 국가적 안정을 도모한 후에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소련은 먼저 임시정부부터 수립한 후에 5년간 후견해 주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미.소 공동 위원회라는 기관을 설립하여 원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소련 이 ‘선정부, 후신탁’을 주장한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3상회담이 열리기 3개월 전인 9월에 소련은 이미 북한에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설립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임시 인민 위원회를 통해 북한은 점차 사회주의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 첫 과업이 토지 개혁. 말이 개혁이지 실제로는 토지 몰수. 이 작업을 완성하는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20여일. 토지를 무상으로 빼앗는 것이니까 시간 끌 일이 없었다.  그 후 주요 산업 기관도 점차 국유화 시켰다.  단체 이름에는 임시라는 단어를 넣었지만 실제로 행한 일을 보면 이것은 완전한 단독 정부였다. 


모스크바 3상회담 결과가 12월 29일자 국내 신문에 보도되자 한반도는 들끓었다.  36년간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해방의 기쁨을 맘껏 누리기도 전에 또다른 식민통치가 왠말이냐고 들고 일어났다. 이번에는 좌익 우익을 가릴 것 없이 모두 한결같이 반탁에 목숨을 걸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열어 중대 성명을 발표했다.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급 한인직원은 모두 본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시키겠다는 내용인데 이는 미군정에게 주어진 행정권을 임시정부가 접수하겠다는 선포였고 미군정은 이를 쿠데다급 반항으로 여기고  김구를 불러 강하게 추궁했다.   


이승만 역시 김구와 마찬가지로 신탁통치에는 반대했지만 대미외교 활동으로 잔뼈가 굳은 그는 한반도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려면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될 수 있으면 정면 도전은  피했다. 


그런데 해를 넘긴  1946년 1월 3일, 그동안 목청껏 반탁을 외치던 좌익 진영이 돌연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찬탁으로 돌변했다. 북에 간 박헌영이 소련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한은 이념적으로 완전히 둘로 갈렸다.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혼란 속에서 갈수록 뜨거워지는 좌우익의 갈등과 반목은 주도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제일 먼저 나선 지도자는 민족주의 입장에 선 김구였다.  그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한 후 두 가지 안건을 내 놓았다. 그 첫째는 정식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통치할  과도정부를 만들 것. 둘째는 이 때 발생하는 모든 결정권은 자신과 이승만에게 일임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승만과 김구. 이 둘은 독립운동 때부터 품은 뜻은 같았지만 실행하는 방법은 늘 달랐다. 이번에도 반탁으로 뜻을 같이 했지만 김구는 돌직구를 날리는 방법으로 밀어붙인 반면 이승만은 미국에서 익힌 능란한 조정술을 기반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계산에 넣어 행동했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의 반탁투쟁에서는 둘 다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우선 우익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태는 김구의 돌직구를 피해 전개 되었다. 비상국민회의에 참석했던 인사들이 김구의 뜻을 들어주는 대신 미군정으로 몰려갔던 것. 


조선 주재 미국 육군 사령부 군정청 군정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부임 당시 그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직업 군인이었다. 사방이 강대국으로 에워싸여 지정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그 작은 땅덩어리이지만 그곳에서 5천년을 버텨낸 역사, 피워낸 문화, 견뎌낸 민족성이 빛을 발하고 있는데 하지는 이를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싸잡아 무시하기까지.  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부임하면서 한 말을 보면 알수 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이 무서워하는 것 셋이 있다;  diarrhea (설사 ), gonorrhea(임질), 그리고 Korea.>  그러면서  한국인도 별수없이 일본인과 똑같은 교활한 종자(The Koreans are the same breed of cats as the Japs)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고 내뱉었다. 


비상국민회의 임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남한에 군림한 하지에게 달려가 중차대한 한국의 현안문제를 그의 손에 들려 주었던 것.    


이에 하지는 이들을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위원으로 임명하고 이를 미군정 최고 자문기관으로 삼았다. 이 기관의 의장은 이승만, 부의장은 김구와 김규식이 각기 선출되었다. 

이승만이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이승만의 절친인  Preston Goodfellow대령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 당시 굿펠로 대위는 이박사의 절친이기도 하지만 하지의 정치고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 당시 한국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오롯이 미국에만 의존해서도 안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당시 미국내에 번지는 친소파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이 소련으로 부터 어떠한 형태의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언제고 한국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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