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실패한 식량정책으로 생긴 대구 10.1 사건
페이지 정보
본문
[우남 26]
<점심 시간쯤 됐는가 몰라요. 중앙통이 인산인해라요.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구역쪽으로 쭉 갔는데 거기에 마루보시 노동자들이 나와 고함을 지르고 시민들도 북적거리고 있고, 경찰들도 총을 들고 설처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대구 공회당쪽으로 돌아서 경상북도 대구경찰서로 가려고 하는데 뻥뻥, 빠빠빠빠빵하고 총소리가 마구잽이로 납디다. 그러자 우리 바로 앞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총상을 입은 거예요. 놀란 시민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우리도 어린 마음에 겁이 안 납니까? 나는 그 길로 학교로 돌아가 가방 챙겨서 쎄가지빠지도록 집으로 도망쳤디요.>
1946년 10월 1일, 길을 가다 우연히 <대구 10.1 사건>을 목격하게 된 한 중학생의 생생한 증언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대충 이렇다.
해방과 더불어 해외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대구에는 역 뒷편 칠성동에 해방촌이라는 빈민부락이 형성되었고. 평소 같으면 새벽에 양조장이나 두부 공장으로 달려가 줄을 선다. 거기서 술지게미나 비지 한 줌이라도 얻어와야 애들을 굶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 10월 1일은 바구니 대신 쌀자루를 챙겨 들고 두부 공장이 아닌 대구부청으로 향했다. 거기서도 줄을 서는 대신 한덩어리로 뭉쳤다. 그리고 외쳤다. 배고파 죽겠으니 쌀을 달라고.
여기에 9월 말 경에 시작된 노조 파업이 힘을 보태면서 사태가 심각해 졌다. 그 날 10월 1일, 대구역 앞에서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 시위가 합세한 것. 이에 당황한 경찰이 출동했다. 돌팔매와 총알의 대결. 오후에 한 명이 총에 맞아 즉사. 피를 본 군중들은 더 흥분하기 마련. 기아시위로 시작한 이 사건은 폭동으로 변질되었고.
이 때의 배고픔은 실제로 먹을 쌀이 없어서 생긴 기아현상이 아니다. 미군정의 남한 식량 정책에 대한 시행 착오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해방이 되자 일제 시대는 가고 38 이남에는 미군정 시대가 열렸다.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지긋지긋한 공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해방의 기쁨에 보태졌다. 일제가 물러나자마자 미군정은 미곡 자유화 정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쌀을 나라에 바치지 않아도 되면서 돈만 있으면 언제나 살 수 있는 시장 자유화 정책. 그런데 그 '돈만 있으면'이 문제였다. 일반 서민들에게는그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미곡 자유화 정책을 악용했다. 매점매석에 뛰어든 것. 돈을 풀어 긁을 수 있는 만큼 쌀을 긁어 모았다. 이로 인해 해방 이듬해는 대풍년이었는데도 시중에 쌀이 없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 쌀값이 무려 30배나 뛴 것. 더군다나 해방을 맞아 해외 동포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식량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다. 여기에 또 다른 악재로 힘을 보탠다. 대구/경북 지역에 콜레라가 발생한 것. 통계에 의하면 약 2,500여명의 환자 중 1,700명이 희생되었다고.
그래서 미군정은 우선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구 지역을 봉쇄, 출입을 금지시켰다. 출입금지를 뭐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랬으면 식품, 생필품, 의약품을 당연히 보급했어야 하는데 미군정은 그 점을 소홀히 했다. 그 당시 그래도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던 전매청 노동자들 조차도 쌀을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궐련을 붙이라고 풀을 주면 그 풀을 먹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미곡 자유화가 매점매석으로 변질되자 미군정이 내놓은 개선책 역시 가관이다. 다시 일제가 실시했던 미곡 공출 제도로 되돌리는 것. 아니 해방과 더불어 숨통을 죄이던 그 공출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또 공출이라니. 한 술 더 떠서 이 공출 제도는 보릿고개 시기에도 적용되었다.
이 어이없는 정책은 시민들의 굶주림에 휘발유가 되어 삽시간에 양조장이나 두부공장으로 향하던 발길을 시청 앞으로 틀게 만들었다. 1946년 10월 1일에 일어난 이 불씨는 전국 73개 시와 군으로 퍼진다.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지금은 TK 정서가 보수 우파에 속하지만 그 당시, 아니 일제강점기부터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 성향이 짙었다. 마치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이 지금은 북한의 수도가 된 것처럼. 그 당시의 TK 정서를 가늠하기 위해 지금은 잊혀진 <인민 항쟁가>의 가사를 음미해 봐야지.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 쟁쟁히 가슴 속 울려온다 /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 /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 원수를 찾아 떨리는 총칼 /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
- 이전글부부들을 향한 권면의 말씀 24.07.25
- 다음글불쌍한 할아버지 10번 태워주세요 24.07.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