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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역사와 과학이 만나 재생된 리처드 III의 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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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5세를 런던탑에 유폐시키고 왕관을 차지한 리처드 3세. 조카를 내쫓고 삼촌이 왕위를 찬탈한 영국판 계유정난 맞다. 한국판이건 영국판이건 어쩜, 시기도 비슷하다. 1400년대 중 후반. 그리고 쫓겨난 에드워드 5세와 단종의 나이가 같다. 둘 다 열두살. 쿠데타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내쫓았고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렸다. 왕이 된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 10살된 왕자를 런턴탑에 가뒀다 죽인 것으로 추축된다.

수양대군에서 조선의 왕이 된 세조는 각종 법령을 재정비하고 체계화한 경국대전을 완성시켰다. 글로체스터 공작에서 잉글랜드의 왕이 된 리처드 3세는 공법 15개조 개혁안을 만들었다. 이 법안은 잉글랜드의 힘없는 평민들을 보호하는 조항들이기에 그의 큰 업적으로 남는다.

예를 들면 죄수에게 보석을 허가하는가 하면 판결 전에는 어떤 공무원도 그의 재산을 몰수할 수 없으며, 비단 레이스, 리본, 가위, 못 따위의 수입을 금했다. 아마도 그 당시의 귀족들을 위한 귀중품인 듯. 포도주와 기름은 양을 재기 전에 용기에 담아 판매할 수 없다. 등등.

하지만 결정적인 한가지에서 영국판과 한국판은 판이하게 갈린다. 이 한가지는 반란 진압 성공 여부.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무난히 평정했기 때문에 13년간을 통치하면서 왕위를 고스란히 대물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처드 3세는 헨리 튜더의 난을 평정하다 전사했기 때문에 고작 26개월을 다스린 후에 그의 왕관은 튜더 가문에게로 넘어갔다.

튜더 가문을 설명하자면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5세 때로 가야 한다. 헨리 5세는 어여쁜 프랑스 공주와 결혼 한 이듬해에 헨리 6세를 낳고 돌잔치도 하기 전에 전사한다. 젊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케트린 왕비는 하급 귀족인 오언 튜더와 재혼한다. 그 사이에서 두 아들, 에드먼드 튜더와 재스퍼 튜더를 얻는다. 맘 착한 헨리 6세는 이들 배다른 두 아우들에게 각기 리치먼드 백작, 펨브룩 백작의 지위를 하사한다. 백장미 요크 가문의 세 번 째이자 마지막 왕 리처드 3세에게 반기를 든 헨리 튜더는 에드먼드 튜더의 손자로 붉은 장미의 랭커스터 가문이다.
프랑스로 망명 중이던 헨리 튜더는 전투 경험은 없었지만 막강한 프랑스 전사들을 앞세우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다. 보스워스 벌판에서 리처드3세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비록 척추는 휘었지만10대부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용장 리처드 3세. 하지만 그의 편이던 귀족들이 눈치를 보다 하나 둘씩 등 돌리는 배신자가 속출했다.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그가 탄 말이 진흙 웅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전사했다. 그의 부하들은 왕이 낙마할 때 벗겨진 황금 왕관을 주워 헨리 튜더에게 바쳤다고. 이로써 30년간 끌어온 장미전쟁은 랭커스터에서 요크로, 다시 랭커스터의 승리로 끝나지만 헨리 튜더가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기 때문에 결국은 흰색과 붉은 색이 혼합된 튜더 장미로 합쳐진 셈.

전승과 함께 황금 왕관까지 거머쥔 헨리 튜더는 헨리 7세가 되어 헨리 8세의 아버지, 엘리자베스 1세의 할아버지가 된다.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1세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활동한 극작가다. 따라서 그의 붓끝은 자연스럽게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렇기 위해선 이전 왕조, 특히 마지막 왕을 묘사하는 붓끝은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잖아도 고약한 인성을 가진 리처드 3세. 아예 인간 말종으로 묘사함으로써 여왕의 총애를 독차지했고, 관객들은 열광했으며, 그가 역사가가 아닌 극작가이기에 아무도 그를 비난하진 않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그러나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를 거친 다음에 들어선 하노버 왕조는 장미전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가문이다. 그래서 그 동안 리처드 3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구석에서 찌그러져 살던 Ricardian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 리처드 3세를 변호하는 단체 라는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 결과 2012년, 런던 북쪽 레스터 시내 한 주차장 바닥에서 리처드 3세로 추정되는 유골을 찾아냈다. 척추는 휘었고 여기저기 칼침 자국이 선명한 뼈들이 관도 없이 그냥 땅 속에 묻혀 있었다. 헨리 8세가 성공회를 만들면서 수도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리처드 3세가 묻혀 있던 Greyfrias 수도원이 일반인에게 팔려 과수원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그곳 레스터 대학 연구팀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모계 후손을 추적, DNA 테스트를 해 본 결과 그 유골은 99.99% 리처드 3세로 판명났다. 500여 년 전의 영국 역사와 현대 과학이 만나 이뤄 낸 기적.

리처드 3세의 재매장은 영국 왕실이 아닌 레스터 대학 고고학부 주관으로 국왕의 예우를 갖춘 멋진 장례식으로 치뤄졌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의 집전으로 레스터 대성당에 다시 묻힐 때 16대 후손이기도 한 유명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계관시인 캐럴 앤 더피의 시를 낭독했다.

이 유골을 축복하라 / 끊어진 끈을 다시 잇고 / 죽었을 때 잘려나간 십자가 / 그곳에 다시 놓여지는 것을 상상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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