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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이랬었는데도 분단의 원흉이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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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지피지기知被知己)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지만(백전불태 百戰不殆), 상대는 물론, 자신조차도 모르면 싸울 때마다 위태롭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백번 옳은 말씀이다. 이승만은 막판에 대일전쟁에 끼어든 소련의 저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정작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을 안겨준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영토적 미련은 없는 반면, 작지만 부동항에 둘러싸인 한반도가 너무나 갖고 싶었던 소련임을. 


이러한 소련의 야욕을 알고 있는 이승만은 이런 집단과는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잘 알기 때문에 애초부터 미소공동위원회의에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회의는 준비모임부터 삐그덕거렸다. 우선 38선을 철패하여 불편한 요소들이 제거된 후에 정치적 합의점을 찾자는 미국측의 주장을 소련이 정면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소련은 우선 임시정부부터 세우고 보자고 우긴 것. 그것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공산주의 단체로만 구성된 임정을. 


이렇게 반탁의 선봉에선 이승만과 김구를 노골적으로 거부한 소련은 박헌영, 여운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남한의 공산당과 긴밀한 접촉을 갖는다. 그리고 서울 YMCA 회관에서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한다. 이는 북한에서 소련군정에 의해 형성, 이미 실질적인  정치 활동을 벌이고 있는 북한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일맥상통하는 단체였다. 


이런 정국을 더 이상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이승만. 한반도의 독립을 순진한 미국과 야심찬 소련 손에 계속 맡겼다가는 이내 적화 통일될 것이 뻔하다 싶은 생각에 독자적인 행보를 취한다. 김규식을 대동하고 충청, 전라, 경상 등 3남지방을 순회하며 반공 캠페인을 벌인 것. 그 당시 전국은 144개 군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114개 군에 이미 독촉국민회 조직이 형성되어 있어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첫 방문지 천안. 제일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3만 군중 앞에서 반공 연설을 마친 후 대전으로 향하던 이승만을 암살하려던 암살단 7명이 검거된다. 


“… 공산주의는 무서운 전염병 콜레라와 같다. 극렬분자들과는 협상은 커녕 타협조차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이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저항할 것인가, 이 둘 뿐이다. 한반도의 자유 독립을 달성하려면 신탁통치와 소련 공산주의를 철저히 거부하고 물리쳐야 한다.”   


이런 요지의 반공 연설은 김천, 대구, 경주, 동래를 거쳐 부산 20만 인파가 운집한 공설운동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정견이 달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을 선동하여 근로 대중을 못살게 만들고 국가 산업을 파괴하는 행위 때문이다. … 토지를 무상 분배 한다고 하나 이것은 국민의 재산권을 무시함이니, 장차 우리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에는  국법을 제정하여 국민 생활복리를 옹호함이 지당하다....” 


마산에서는 미군 800여명으로 구성된 해병대 군악대의 환영을 받으며 반공 캠패인을 벌였고 순천에서는 하와이 동지회원이었던 김양수 군수의 영접이 뜨거웠다. 벌교를 지나자 왜 그냥 지나가시냐면서 그곳 부인회의 꿀물 대접도 받았고. 보성에서는 기념 식수도 했고. 장흥을 거쳐 목포에서는 3만명, 광주에서는 5만 군중이 모여 이승만을 지지했다. 그 때 그 곳의 분위기는 지금과 사뭇 달랐나보다. 


두 시간의 연설을 끝내고 그날 미소공동위가 합의점을 찾자 못하고 무기연기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기자들을 불러서 다음과 같이 유감을 표시했다. 


“… 소련이 미국과 순리적으로 잘 해결할 줄 알았더니 그걸 못하고 미국 대표들도 좋은 기회를 잘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 매우 유감이다. 38선 문제도 소련이 해결 못하면 소련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나는 그것을 큰 불행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 국민의 결심으로 공산당의 제안을 접수치 않기로 하였고, 우리 강토를 단 얼마라도 남에게 양여치 않을 결심이니 이것을 소련사람들이 하루 바삐 각성하기 바란다.” 


순회 강연을 마치고 귀경한 이승만은 곧이어 서울 운동장에서 국민대회를 열었다. 100여개의 우파 정당과 사회단체 등에서 모여든 10만 군중의 손에는 <신탁통치 절대 반대> <38선을 철패하라> 등의 문구가 쓰인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곳에서 미소공위가 무기 연기된 것에 대한 책임규명과 국제 여론의 심판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후 다시 남행길에 올라 정읍에 도착,  <6.3 정읍 선언>을 발표한다. 1946년 6월 5일자 조선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이제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야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야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에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야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이 기사를 본 남한의 좌익 단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일어났다. 민주주의 민족전선,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부녀총동맹…. 이들의 이승만에 대한 한결같은 호칭은 분단의 원흉, 망국의 분열주의자, 늙은 파시스트 … 언어로 때린 인민재판. 


정읍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이 아니라 오히려 절박한 시기에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졌다고 봐야하는 것이 아닐까? 이래도 나를 알고 적을 잘 알아 현실적으로 대처한 이승만에게 계속 돌을 던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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