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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장미전쟁을 종식, 튜더 왕조를 창시한 헨리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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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스터 가문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는 리처드 3세를 몰아내고 왕이 됨으로써 300년 간 이어온 플렌테저넷 왕조를 역사 책 속으로 집어넣고 새로운 가문 튜더 왕조를 열어 그 첫 왕이 되었다. 그런 후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골육상잔만을 일삼던 두 가문은 한 왕조로 통합된다. 장미 색으로 설명하자면 요크 가문을 상징하는 흰 장미와 랭커스터 가문을 상징하는 빨간 장미를 접붙여 빨갛고 흰색으로 피는 신종 튜더 장미를 개발한 셈.

왕좌 하나를 놓고 두 가문이 1455년부터 1485년까지, 30년 간 엎치락뒤치락하며 국력을 소모하던 장미전쟁은 이로써 마무리되고 이제 잉글랜드에는 새 시대가 열렸다. 그 뿐만이 아니라 왕후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식을 두어 며느리는 타국에서 데려오고 딸들은 타국으로 시집 보내는 정략 결혼으로 외교적으로도 큰 수확을 거둔다.

15세기 당시 이러한 통합은 영국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두 왕국이 통합되어 새로운 왕국이 탄생한 것.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라와 결혼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이름은 로마시대의 그곳 지명이었던 Hispania를 채택하기로 했고 구개음화 과정을 거쳐 스페인어인 에스파냐로 변화, 지금에 이른다. 영어식으로는 스페인.

이렇게 큰 나라가 된 에스파냐와 친하게 지낼 필요를 느낀 헨리 7세. 그 나라의 막내 공주인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을 데려다 맏며느리로 삼았다. 그러나 황태자 아서가 결혼 5개월만에 갑자기 요절해 버린다. 시아버지는 결혼하자마자 과부가 된 맏며느리 캐서린을 둘째 아들인 헨리와 약혼시킨다. 헨리 7세가 죽은 후 그는 헨리 8세와 재혼하여 그의 첫 부인이 되고 둘 사이에 그 유명한 Blood Mary 를 낳게 된다.

헨리 7세의 정략결혼에 의한 외교정책은 에스파냐와 사돈을 맺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가렛 공주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에게 시집 보낸다. 그리고 메리 공주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에게 보내고. 모두 7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헨리, 마거릿, 메리 외에 더 이상 결혼 시킬 자녀가 남아있지 않았다. 황태자 아서를 비롯하여 4명의 자녀가 모두 요절한 것. 남은 세 자녀들도 결혼 후 사별, 이혼, 재혼을 반복하며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암튼 이런 식으로 잉글랜드의 국제적 입지를 든든히 다진 그였지만 국내에서는 수시로 터지는 반란에 시달렸다. 사실 혈통으로 따지면 그의 왕위 계승권은 모계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가늘게 이어지기 때문에 요크 가문의 반란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는 리처드 3세 둘째 형의 아들인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고 런던 탑에 가둬 놓을 정도인데 이를 이용, 가짜 워릭 백작까지 나타나 괴롭힐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후에 가짜를 잡아다가 궁정의 부엌데기로 일하게 해서 그가 진짜 가짜임을 입증했다고. 이같이 처형하거나 가혹한 진압보다는 회유책을 쓰면서 반란을 잠재웠기 때문에 반란은 차츰 잦아들었고 헨리 7세는 새 시대에 걸 맞는 효율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다.

그 첫째가 새롭게 부상하는 애국심 두둑한 신흥 중산층을 기용하기 위해 Gentlemen과 Yoman이란 계급을 만들었다. 이는 평민에게도 출세의 길을 마련해 주는 동시에 기존 귀족 세력을 억제하고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이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헨리 8세는 왕권 강화에 이어 해군력까지 증강시켰고 이렇게 커진 국력은 다음 세대인 엘리자베스 1세의 황금기로 이어진다.

다음으로는 항해조례를 제정한 일이다.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포도주를 수입해 오는 수입선은 잉글랜드 국적을 가진 선박으로 제한한 것. 이 때문에 잉글랜드 상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그 동안 장미전쟁으로 피폐해진 재정도 보충되었고 민심도 얻은 일석이조의 계책.

뿐만 아니라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얻은 제노아 출신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을 본 헨리 7세는 이탈리아 출신 항해자인 존 캐벗경을 시켜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보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그의 보고서를 토대로 장차 영국이 해양대국으로 발 돋음 하는 발판을 만들었고 이는 먼 훗날 미국을 식민지 삼는데 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짠돌이 근성은 유명하다.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한 후 대관식에 쓸 돈이 아까워 차일피일하다가 요크 지지자들의 반발을 산 것. 황태자인 아서가 죽자 며느리가 가져온 지참금 20만 크라운을 돌려주기 싫어 캐서린을 잡아둔 것. 그런 후 차남 헨리와 결혼시키려고 사돈 페르난도 2세에게 새로운 지참금을 요구했지만 못 받는 바람에 캐서린을 푸대접하면서 결혼을 계속 미룬 것. 이미 사문화된 선박세를 부활시켜 해군을 지원한 것…… 하지만 이러한 긴축재정 덕에 30년간 전쟁으로 거덜난 국가를 지탱할 수 있었으며 이렇게 모은 돈은 후에 선박 건축용으로 긴요하게 쓰였다고.

1503년 왕비 엘리자베스가 8번 째 아이를 낳다 아이와 함께 죽자 왕비를 지극히 사랑했던 헨리 7세는 우울증에 걸린다. 신하들이 새 왕비 들이는 것을 주선했지만 이때도 사람보다는 지참금만 밝히는 바람에 모두 차인다. 특히 며느리의 언니이면서 정신병으로 유폐 당하고 있던 카스티아의 후아나에게까지 청혼했을 정도로 돈을 밝혔다고. 그러다 끝내 새장가는 못 들고 결핵을 앓다가 52세에 세상을 뜬다. 아들 헨리 8세가 워낙 유명해 그 그늘에 가려서인지 23년간의 그의 업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대신 브랜디 제품명으로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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