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통일 국가를 세우려면 남한에도 과도정부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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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27]
미군정이 이승만을 멀리하고 대신 좌우합작에 힘을 실어주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연설한다.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그리고 6개월 후인 12월 초 워싱턴으로 향했다. 미국무장관 등 고위관리들에게 남쪽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세워야하는 이유를 직접 만나서 설명하며 설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미 미국에 미운털이 박힌 이승만을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미국이 공들이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방해가 되는 인물로 찍힌 미운털. 이에 좌절하지 않고 이승만은 미국에 계속 체류하면서 미국무성에 건의서를 넣었다.
<남북조선이 통일되고 뒤이어 남북 총선이 이루어질 때까지 남조선지역에서 행정을 담당할 과도정부가 선거에 의해 수립되어야 한다. 이 남조선지역의 과도정부는… 유엔에 가입되어야 하며 한반도에 대한 군사점령 및 기타 중요문제들에 관해 미국 및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남조선지역에 주둔하는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한반도에서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주둔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한편으로는 그의 주특기인 언론 매체를 통해 <미국무성 안에 공산주의로 기우는 자들이 있는 듯 하다. … 남한 주둔 사령관 하지 중장은 좌익에 호의를 갖고 남한의 공산당을 원조하고 있다. … 하지 중장은 남조선 입법의원 관선의원의 상당수를 공산주의자에게 배정 임명했다. …> 라는 폭로성 기사를 내면서 남한에 임시정부가 빨리 수립되지 않으면 결국에는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우남의 반소. 반공 사상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앞뒤 재고, 기회를 엿보다가, 이것이 유리하다 싶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한성감옥에서, 아니 그 이전에 배재학당 시절부터 싻튼 것이다. 그때 대부분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을 때 우남은 달랐다. 그의 눈길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를 더듬었다. 그러면서 한반도의 미래를 걱정했다. 소련을 탐욕스런 호랑이로 비유하면서 이 호랑이가 온 세계를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보고 으르렁거린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당시의 국제정세를 약육강식의 관계로 파악한 우남은 시베리아에 철도가 놓여진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 러시아인이 감희 서쪽으로 다시 엿보지 못하고 범 같이 탐하는 눈을 동으로 돌이키니 밤중 같은 천지에 허다한 생고기가 무수히 널렸는지라. 1882년 시베리아 철도를 시작하여 14년을 작정하고 1만 8천리 가량을 통하여 나오니 이는 그 수도에서 군사를 파송하여 아세아주 동방 끝에 나오기를 지척같이 하고자 함이라. 해상 위로 지척을 삼으니 곧 대한 북도와 청국 동편에 연접한 곳이라. 이 지방에 달하여 동양천지를 임의로 호령하고자 함이라. 서양에서 막은 물이 동양에 미쳐오는지라. 그 위급 절박함이 실로 조석에 달렸도다….>
이렇게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 구도를 잘 파악한 우남은 한국같은 약소국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음도 간파했다. 을미사변이후 한국을 둘러싼 일본과 러시야의 세력 다툼 역시 이리와 여우의 싸움에 비유, 그 틈바구니에서 한국의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놓였음을 우려했다.
<비록 스탈린이 카이로 회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모종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 카이로 선언은 고의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한국 문제를 추후 결정사항으로 남겨 놓았다. 이는 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이 아직 정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나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한국에 대해 단지 형식적으로 독립을 논의할 뿐이며 실제로는 소련 지배 하에 한국 정부를 두기로 결정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우남은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침략과 수탈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미국 유학을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 졌다.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들이 카이로에 모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합의하자 우남은 이를 한국 독립을 무한정 연기시키려는 소련의 음모로 보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년 후 국제정세는 이승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유리한 쪽으로 흘렀다. 1947년 3월, 이승만이 아직 워싱턴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점차로 세력을 키우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도 반공노선을 선언하는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동유럽에 공산 세력이 빠르게 번져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헝가리 등이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트루먼은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견제해야 할 적국으로 간주하게 된다. 냉전의 시작이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가 출범하게 되고 전후 복구를 적극 지원하기 위한 마셜플랜이 세워진다.
마침 내전 중인 그리스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 터키까지 불안해 지고 이는 중동의 정세 불안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트르먼 행정부. 전략적 요충지인 이 지역은 반드시 챙길 결심을 하게 된다. 이는 지난 백년간 고수해온 고립정책인 먼로 주의에서 탈피, 이제 미국이 글러벌 차원의 제국주의 국가가 될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 후에 이를 트르먼 독트린이라 부른다.
트르먼 독트린에 이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한반도에 민주적인 통일국가가 세워지려면 북한처럼 남한에도 임시정부가 필요하다는 이승만의 주장은 비로소 인정받게 된다. 이때부터 미국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 추진하기시작한다. 적시에 트르먼과 이승만의 절묘한 만남. 기독교 신자인 나에게는 결코 우연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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