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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피아를 식별하고 지피지기 원칙을 일깨워 준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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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51>


피아 (彼저피 我몸기), 상대가 누구인지, 자기는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아 이 둘을 확실하게 식별한 다음에는 우선 상황부터 정확히 파악하라.  그런 후에 작전을 짜거나 계획을 세우면 승리의 길이 보인다는, 손자 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 가깝게는 일전에 겪은 한국의 깜짝 계엄에도 적용되는 사자성어이지만 6.25 전쟁을 겪은 한국이 딱 그랬다.  


20세기는 초반에 일어난 볼세비키 혁명의 여파로 온 세상이 사회주의 열기에 들떠 있던 때. 엘저 히스같은 구소련의 간첩은 미국무성에까지 침투했을 정도. 이 와중에 한반도에서는 6.25가 터졌다. 이 전쟁이 언뜻 보기에는 내전같아 보이지만 속내는 달랐다. 공산주의가 자유민주주의에 도전장을 디민 국제전이었다.  그것도 지피지기 원칙도 무시한 채 칼부터 빼고 들이댄 것.  


무려 3년 동안 줄줄 흘린 젊디젊은 피로 그은 휴전선. 그 대가가 엄청났지만서도 일방적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니 어쩌랴, 이를 역이용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계기로 삼아 전화위복의 성공 신화를 쓴다면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한방 먹인 통쾌한 복수. 전후 작업을 서두루던 대한민국의 심정이 딱 그랬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6.25를 통해 다시 태어났다> 이 한마디를 듣고 싶었던 것. 그런데 이 한마디를 들었다.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이 있다. 며느리이거나 딸이거나거나 주연이거나 조연이거나에 상관없이 대체로 여자 출연자들이 보이는 행동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들이 뿔났을 때 그 화를 삭이는 한 방법이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출출할 때 보이는 행동으로, 우선 몸을 구부려 양푼부터 꺼낸다.  밥솥을 열고 적당량의 식은 밥을 푼 다음 냉장고를 연다. 동물성 식물성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온갖 잔반들을 다 털어 넣은 후 고추장 듬뿍, 참기름 아낌없이 투척한 후 스윽쓱 비빈다. 이것이 화풀이용일 때 더 잘 비벼지는 양푼 비빔밥. 


전후 대한민국의 사회가 바로 이랬다. 피난, 납북, 월남, 월북 등의 이유로 말 그대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 온 국민이 온통 섞였다.  통계에 의하면 약 10만명 정도가 월북했지만 이남으로는 약 140만 정도의 피난민이 내려왔다.  이 중 상당수는 지식계급이거나 유산자 또는 기독교인들로 서방 세계에 열린 마음을 가진 개화된 인재들이었다.  북한은 이러한 인구 감소 현상이 전후에도 악재로 작용, 오늘날의 퇴행성 사회 현상과 연결되는 것은 아닐지….  


그 당시 남북한을 막론하고 웬만한 남자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대부분이 아녀자들만 남았다.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 세대. 이들은 생사를 모르는 남편을 걱정하거나 남편의   전사통지를 받고도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당장 늙으신 부모나 딸린 자식들, 아니면 어린 시동생들의 끼니를 위해 곧장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이렇게 한반도 전체의 지역 문화가 뒤섞여 범벅이 되고 나니 덩달아 먹거리 문화에도 변화가 일었다. 재료를 구할 수가 없으니 비슷한 것으로 대충 섞어 비슷한 맛을 낸 음식들. 그 대표적인 음식이 북한의 냉면이다.  월남하여 부산에 모인 북한 피난민들이 냉면이 그리운데 메밀을 구할 수가 없으니 아쉬운대로 밀가루로 대치한 것이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밀면이다.   그런데 내 입맛에는 부산 밀면이 평양 옥류관에서 맛본 슴슴한 냉면보다 한 급 위. 이 외에 미군 부대에서 잔반 처리용으로 나온 육류에 한국적 토속성을 가미한 부대찌개, 만두의 전국 확산, 속초 피난민들의 작품인 오징어 순대 등을 들 수 있다.  


휴전이 성립되면서 출산율도 높아져 1955년 이후에는 인구 성장률이 2.9%였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비하면 이는 천문학적 숫자.  그렇게 힘들고 제대로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에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생산했었는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금 젊은이들은 좀 너무 이기주의인 것 같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여건이 안 된다지만 그때만 할라고. 쯧. 


이런 높은 성장률과 더불어,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는 농민들, 전쟁으로 기능을 잃어버린 지방의 중소 도시 인구가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가 급속도로 팽창했지만 그 당시 막 일어서려는 각종 전후 복구 사업에 투입되어 산업 발전에 힘을 보탠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그런 힘든 일은 하기 싫어 저개발국의 인력을 들여다 쓰고 한국의 젊은이들은 고급 실업률 증가에 힘을 보탠다지. 쯧.    


전쟁으로 인한 부작용 역시 심각했다. 전쟁 고아와 미망인들이 양산되고 주한 미군의 파트너가 된 양공주들과 혼혈아들. 어느 어둑어둑 해질 무렵 ‘메리, 메리’ 울부짖으며 잃어버린 딸을 찾던 동네 양공주의 헝클어진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리 저리 휘젓고 다니는 상이 용사들의 분노에 찬 울부짖음.  나라를 위해 몸이 상했으니 최소한의 기초 생활이라도 보장해 주어야 마땅 하거늘 정부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래서 끓어 오르는 울분을 참을 수 없는 이들이 잃은 손에 부착된 쇠갈고리를 휘져으며 나머지 손으로 휠체어를 돌리며 다가온다.  길가다 이들을 만나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6.25전쟁을 동족상잔으로서만 치부하기 보다는 이왕 당한 것 그 고난에서 챙길 점들은 무엇이 있을까를 짚어 보았다.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지피지기. 공산주의가 얼마나 허황된 이론이고 사회주의가 얼마나 야비한 착취인가를 경험으로 알았다는 사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이처럼 눈부시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유 민주주의의에 합류했기 때문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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