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2세의 개혁때문에 배심원이 되었던 추억 하나 >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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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헨리 2세의 개혁때문에 배심원이 되었던 추억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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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9>


20여년간 끊임없이 이어진 왕위쟁탈전을 종식시키고 잉글랜드에 플렌테저넷 왕조를 심은 프랑스 앙주(Anjou) 출신의 헨리 2세 (재위기간1154-1189). 이제 그는 스코틀랜드로부터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강력한 왕국의 군주답게 사법, 행정, 외교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개혁을 단행,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 당시, 그러니까 봉건제도가 성행하던 12세기는 영지 내의 재판권은 영주에게 주어졌다. 때문에 같은 종류의 소송이라도 지역에 따라, 또는 영주의 재량에 따라 판결이 각기 달라진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또 봉건 영주들의 세력도 약화시킬 겸 언제 어디서나 일정하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 Common Law를 만들었다. 이는 성문화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문법, 관습법, 또는 Case Law라고도 불리며 오늘날까지 영국과 미국 법정에서 실행되는 법이다.

1166년부터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정해진 때에 정해진 코스를 돌며 시비를 가리는 순회 법정을 만들었다. 이 때 각기 100호 당 12명의 배심원단이 구성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 시민이면 누구나 법정으로 호출되면 배심원석에 앉게 된다. 단 70세가 넘으면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고. 늙어서 좋은 것 중의 하나.

통지서를 받고 정해진 날 아침에 법정에 가면 무슨 기준으로 뽑는지는 모르지만 12명의 배심원과 만약을 대비한 Alternate 1명을 호명한다. 그 언젠가 나에게도 미국 법정 재판을 구경할 기회가 주어졌다. Alternate 으로 호명되어 정식 배심원석엔 앉지도 못하고 따로 마련된 작은 의자에 앉아 구경했다. 그 때 배운 것 한가지. 소송에 걸리면 좀 비싸더라도 그 분야에 경험이 풍부한 전문 변호사를 선임할 것. 한 젊은이가 일어나 변호라고 하는데 어찌나 버벅대며 쩔쩔매던지 ….

영화에서만 보았던 미국 재판도 실제로 참여하여 구경했으니 이젠 되었다 싶었는데 또 나오라는 내용의 엽서를 받았다. 이번엔 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방안 그득히 많은 사람을 불러 놓고 그 중에서 12명 추리기 직전, 배심원이 되지 못 할 사유가 있는 사람은 그 사유를 밝히라기에 우선 손부터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 ‘보시다시피 내 모국어는 영어가 아니다. 그냥저냥 의사 소통은 가능하지만 법정 용어는 전혀 모르니 난 자격 미달이다.’ 라고 버벅거렸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배심원이 법정 용어까지 알 필요는 없고 소통은 그 정도면 충분해.’ 두 팔로 X자 그리고 헤푼 미소 내뿜으며 ‘노 잉글리쉬’ 라고 했어야 했나?

암튼 그 때는 정식 배심원이 되어 장장 닷새를 출근했다. 회사 대 회사의 소송이었기 때문에 쉽게 끝나지 않았다. 원고측인지 피고측인지 밝혀지지 않은 푸짐한 점심이 제공되기는 했지만. 마지막 날엔 집에 가기 전에 12명만 모여 각자 돌아가며 느낀 점을 말하고 뭐든 결정을 내려야 한다. 내 차례가 왔다. 또 나의 단골 메뉴, 모국어를 들먹이며 ‘그래서 70% 밖에 이해하진 못했지만’ 하면서 나름 느낀점을 말했다. 내 옆의 백인 남자가 난 영어권이지만 나도 70% 밖에 … 라며 내 말을 받는 바람에 모두가 깔깔대며 그 간의 피로를 훅 날려 보냈던 기억이 새롭다.

헨리 2세의 사법 개혁이 봉건 영주들의 재판권을 몰수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당시 시행되었던 종교재판과는 날카롭게 대립하며 갈등하다 마침내 헨리 2세의 과업에 큰 오점을 찍는 사건이 발생한다. 헨리 2세가 홧김에 내지른 한마디가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 살해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토마스 베켓은 노르만족의 후손으로 런던에서 태어나 캔터베리 대주교인 데오볼드 (Theobold)의 서기로 일했다. 그러다 토마스의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본 대주교는 그를 왕에게 추천했고, 왕은 그를 고위 관직에 등용, 봉건 군주국에서 관료 군주국으로 탈바꿈하는 개혁 정책의 실무를 맡겼다. 이지적이고 우수한 행정능력을 가진 토마스는 이 업무를 충실히 해 내 헨리 2세의 총애를 받았고 토마스 역시 왕에게 충성하며 잘 지냈다. 문제는 데오볼드가 서거하자 그 자리에 토마스 베켓을 임명하고부터 발생했다.

헨리 2세는 그동안 왕권에 위협이 될 정도로 세력을 키운 교계를 견제할 생각으로 토마스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앉힌 것. 그러나 이러한 왕의 기대와는 달리 토마스는 대주교로 임명되자 금욕적인 성직자로 돌변, 이러한 힘겨루기에서 오히려 교황을 등에 업고 헨리 2세의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화가 난 헨리 2세가 내뱉은 한마디 ‘나는 저 짜증나는 수도자를 제거해 줄 신하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이 소리를 들은 과잉 충성 신하 4명이 베켓을 제단으로 끌고 나와 살해한다.

베켓이 취한 태도가 세속적인 견지에서 보면 왕과의 대립이지만 교회 측의 견지에서 보면 그가 살해 당하기 직전에 남긴 말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를 지키는 신앙에서 나온 정당한 행위였다. 이 소식이 3년 동안 바람을 타고 유럽에 널리 퍼지자 교황청은 베켓을 성인으로 시성했다. 그 후 그를 추모하는 순례 행렬이 300년간 지속되었다.

14세기들어 제프리 초서는 이들 순례자들이 순례 도중에 했던 이야기를 모아 영어로 인쇄된 최초의 이야기 책 <캔터베리 이야기>를 썼고 20세기에는 T. S. Eliot이 쓴 <대성당의 살인>의 주제가 되었다. 이 때 특기할만한 사실은 헨리 2세는 베켓과 갈등하는 동안 파리의 유명한 학자들과 성직자들을 옥스포드로 불러들여 1168년에 대학을 설립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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