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나의 인생 중 70년의 삶을 돌아보면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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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성중앙교회에서의 목회 생활 11년
필자가 보병 제20사단에서 군목으로 제대(1983, 7,31)를 한 후에 동암교회(당시 담임/한석지 목사, 이미 작고하심)에서 부목사로 1983년 10월부터 1984년 4월말까지 6개월 동안 사역을 하였었다. 그리고 나서 필자가 부임한 교회가 바로 서울 노량진에 위치한 장성중앙교회(예장 합동측, 서서울 노회 소속)였었다. 필자는 그 교회에 1984년 5월부터 1995년 3월까지 약 11년 동안 30대의 젊은 나이에 담임목사로서 두 분의 징로님들과 함께 사역을 하게 되면서, 당회의 운영법에 대해서도 배우고, 제직회를 운영하는 법과 목회자로서 교우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 나가야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었다.
담임 목사로서 설교하는 일과 주일 예배를 인도하는 법과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법, 그리고 새벽기도회를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배울 수가 있었다. 아무튼 11년의 긴 기간 동안 교회가 장승백이에 월세로 있었는데, 3번의 이사를 하게 되면서 교회 건물을 나중에는 상도동 쪽으로 이사를 해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월세 교회에서 전세 교회(1억원의 전세 교회당)로 만들게 되었었고, 목사의 사택도 5천만원의 전세로 준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1년의 세월이 흐르게 되면서 필자에게 무서운 고질병인 퇴행성 관절염이란 질병으로 인하여 다리를 너무 절게 되었었고, 다리에 심각한 통증으로 인하여 지팡이를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필자는 그 교회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1995년 3월 말로 그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을 하고서 미국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8) 미국 이민과 퇴행성 관절염 치료와 수술
그리고 나서 우리 가족은 신학교 선배 목사님의 권유로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필자의 질병을 치료받기 위해서 가족들(아내와 두 아들들)과 함께 이민을 왔던 것이다. 그 때가 바로 1995년 4월의 일이었다. 신학교 선배 목사님의 도움으로 필자는 1996년 9월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마국에 채류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필자는 휴스턴에 있는 메디칼 센터의 벤탑 병원에서 1996년도에 전신 마취를 해서 양쪽 고관절에 인공 관절을 넣는 수술을 2번에 걸쳐서 받게 되었었고, 그 다음해인 1997년 2월 경에는 메디칼 센터에 있는 Methodist Hospital에서 마지막 수술인 왼쪽 무릎에 인공관절을 넣는 대수술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3번에 걸쳐서 대 수술을 다 받은 이후에 필자는 그 동안에 걸을 때마다 의지하였던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불편한 다리였지마는 어느 정도 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리가 아픈 상태에 있을 때에는 휴스턴 충현장로교회(당시 PCA 한인남부노회 소속, 당시 담임/이은재 목사)에서 이은재 목사님의 배려로 필자가 교육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1995년 4월부터 1999년 6월까지 약 4년 동안 사역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이 되자 필자가 미국에 체류하도록 도움을 주셨던 그 선배 목사님께서 한국에서 청빙이 있어서 한국으로 들어가시고, 그 목사님이 개척하셨던 어스틴 충현장로교회에 담임목사가 필요하여서 필자가 그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해 갔던 것이다. 그 교회에 필자가 1999년 7월에 부임하였다가 필자 가정의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그 다음해인 2000년 7월 말부로 사임을 하고서 두 아들들을 데리고 다시 휴스턴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스틴에서 학생 교회를 목회 할 때에는 필자가 두 아들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고, 필자의 아내는 휴스톤에 우체국이 직장이어서, 주중에는 아내가 휴스턴에 있는 어느 성도님 댁에서 거주하면서 직장을 다니다가, 주말이 되면 어스틴으로 내려와서 주일에 교회 일들을 돕고서 월요일 새벽이 되면 다시 휴스턴으로 출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반복해 오다가 1999년 12월 어느 날 월요일 새벽에 아내가 어스틴에서 휴스턴으로 출근을 하다가 아이 텐에서 너무 피곤하여서 졸음 운전을 하다가 자동차 대형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아내가 운전하던 자동차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아서 폐차를 시켜야 했었지마는, 그러나 필자의 아내의 생명 만큼은 능력의 아버지 하나님이 살려 주신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끔찍한 사건도 있었고 해서, 필자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결단을 내리고 가정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섬기던 교회를 사임을 하고서, 휴스턴으로 다시 이사하였던 것이다. 그 때가 바로 2000년 8월 초의 일로 기억이 된다.
휴스턴에 이주하여서 8월과 9월 두 달 동안 교회 개척 문제를 놓고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필자가 살고 있는 Kensington Club 아파트를 중심으로 인근에 있던 열 개의 교회에 교회 개척을 하고자 하니, 귀 교회의 교회당을 빌려 달라고 하는 내용의 편지들을 영어로 써서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냈던 10통의 편지들 중에서 아홉 통의 편지들에서는 아무런 응답이나 연락이 없었고, 오로지 한 통의 편지만 필자에게 다시 연락이 왔던 것이다. 할렐루야! 그 교회가 바로 필자가 처음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던 메모리알 지역에 있던 ST. Thomas Presbyterian Church(PCUSA)였던 것이다.
9) 새믿음장로교회 개척 이야기
이렇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축복 속에서 필자가 두 분의 남자 집사님들과 한 분의 여자 집사님과 함께 밑바닥에서부터 교회를 개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가 바로 2000년 10월 1일 주일의 일이었다. St. Thomas Presbyterian Church에서 우리 믿음장로교회가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미국 교회의 예배를 다 마친 후인 오후 1시 30분에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수요 저녁 예배와 토요 새벽기도회를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그렇게 주간에 3번씩이나 본당 건물을 사용하는데에도 미국교회에서는 전혀 렌트비를 요구하지 아니하고, 한인 커뮤니티의 전도를 목적으로 필자가 섬기는 교회를 약 10년 동안이나 빌려 주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요, 이 얼마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었다면 전혀 가능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 교회애서 약 10여년 동안을 예배를 드리면서도 필자는 날마다 드리는 기도에 이 기도를 빼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도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 교회도 주일마다 오전에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배당 건물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젊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려 오다가 2010년이 되어서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2010년 1월에는 우리 “믿음장로교회”가 “뉴송교회”와 합하게 되면서, 교회 이름을 그 때부터 “새 믿음장로교회”로 변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정부에 등록한 영어 이름은 그대로 “Korean Faith Presbyterian Church of Houston”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 합하게 된 교회가 바로 그 해 7월에 광명교회였던 것이다. 광명교회는 9742 Clay Road에 교회당 건물이 이 있었지마는, 성도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상도 목사님의 제안으로로 필자가 섬기고 있던 새믿음장로교회와 합병을 하게 되면서, 필자는 약 30여명의 성도들을 데리고 Clay Road에 있던 광명교회로 이사를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가 바로 2010년 9월 5일 주일에 있었던 일이었다. 두 목사들이 서로 의논을 하여서 교회 이름은 “새믿음장로교회”로 하기로 하고, 담임목사는 필자가 하기로 하고, 필자의 신학교 후배인 광명교회 목사는 부목사로 시역을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10) 교회당 건물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새믿음장로교회의 이전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와 축복으로 교회 개척 10년 만에 클레이 로드로 이전하게 될 때에 그 교회의 부채들(약 13만 달러 정도)을 모두 다 안고서 우리 새믿음장로교회가 페이먼트를 감당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서는 매월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가기 위해서 월 1,500불 정도를 지출을 하고, 부목사에게도 매월 사례를 드리고, 필자도 사례를 받았는데, 당분간은 교회에 재정이 어려워서 담임 목사의 사례 중에서 천 불을 깎아서 부목사에게 사례를 드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재정이 어려운 중에도 그 교회당 건물이 너무 낡아서 수리를 하는데에만 약 10만불의 재정이 들었었는데, 그 모든 재정들을 성도들을 통해서 우리 능력의 하나님이 모두 다 채워 주셨던 것이다. 한번은 현대 자동차의 정몽주 회장의 부인이었던 이정화 여사가 MD Anderson Hospital에 췌장암 치료를 받기 위해서 2009년 10월에 입원을 하고 있었을 때에 어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고서, 필자가 아내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가서 이정화 여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 드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2009년 10월 5일) 다시 전화가 와서 지난 밤에 이정화 여사가 돌아가셨으니, 장례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필자가 장례 식장으로 달려가서 장례 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정몽구 회장이 필자에게 사례로 5,000불을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교회 앞에 그 첵크를 건축헌금으로 드렸던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우리가 교회를 이사하게 되었을 때에 교회 재정이 많이 어려워서 필자가 성도들의 권고를 듣고서 정몽구 회장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편지를 한 장 써서 보내었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정몽구 회장의 지시로 휴스턴에 있던 어떤 자매 회사를 통해서 다시 교회 앞에 10,000불의 건축헌금을 보내 주셨던 적이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눙력의 하나님이 도우시고, 함께 해 주셔서, 교회의 모든 공사들을 무사히 잘 마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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