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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인물탐구] “죽을 때까지 지금 하는 일을 하는 게 나의 유일한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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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인물탐구]

“죽을 때까지 지금 하는 일을 하는 게 나의 유일한 행복”

  풍성한 신앙의 여정이 깃든 아름다운 이름 ‘안용준’ 변호사


 
기자가 한 인물을 조명하는 기사를 쓸때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그 사람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한 가지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릴레이 인물탐구>는 기자의 평가(감정)가 배제된, 그 사람 본연의 팩트만을 서술해 가장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 사람의 행보가 온전하게 전해졌으면 하는 취지로 기획했다.

매주 첫째 셋째 금요일자 신문으로 소개하는 인물탐구의 그 첫회 인물은 대다수의 목회자가 추천했다는 것을 먼저 알리며, 이번 주인공이 다음의 인물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시리즈를 이어간다는 점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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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만명도 안되는 작은 마을 그랜버리(Granbury, 텍사스주 달라스와 포트워스의 중간지점). 안용준 변호사는 1974년 미국땅을 처음 밟고 입학한 Granbury의 중학교 생활부터 떠올린다. 오로지 백인들 또래들로만 채워졌던 학교에서 15명 동급생들이 떼를 지어 안 변호사를 괴롭혔던 시절이 그의 인생에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작은 체구의 볼품없는 동양인 학생은 그들의 노리개가 되기에 충분했고 "온갖 미국식 욕설을 한꺼번에 배우기도 했던 1년 동안, 백인 동급생들의 손찌검에 발길질은 차라리 견딜만 했다"는 안 변호사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게 발가벗겨 놓고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찬물로 끼얹을 때마다 딱! 죽어버리면 이 고통에서 해방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근근히 버텨나갔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한 점 등불로 다가온 마이크 목사 


원자력 발전소에 근무했던 아버지가 한국과 미국을 어머니와 함께 종종 오가는 와중에도 혼자 미국땅에 남겨진 아들은 그런 고통을 하소연함으로써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는 안용준 변호사는 "하루를 안 거르고 괴롭히는 아이들의 폭행이 거의 벼랑의 나락으로 다다르게 할 즈음에 한점 등불로 다가와 자신을 일으켜준 한 사람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목숨을 부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일요일까지도 집앞에 찾아와 괴롭히는 백인 소년들을 피해 몸을 숨긴 은신처가 동네 교회였고, 그곳에서 만난 마이크(Mike)란 이름의 목사가 아무것도 묻지도 말하지도 않고 거둬준 덕에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는 안 변호사는 "친 아버지 이상으로 자신의 곁을 지켜준 목사님이 하나님까지 만나게 해준 결과로 은혜가 충만한 반듯한 모범생으로 변모하게 됐다"며 비로소 환한 미소를 짓는다.


대학 졸업후 1990년에 법관 면허증을 취득하고 버진 아일랜드 주의 주검사로 입문해 33년째 법조계에서 일하고 있는 안 변호사는 2001년에 비로소 변호사란 타이틀과 만나게 된다. 600여명의 변호사를 거느린 미국에서 내노라하는 로펌회사 Locke & Lord에서 2년, 그리고 미 전역에 100여개의 오피스를 갖고 있는 Denton에서 2년의 경력을 쌓고 휴스턴에 새 둥지를 튼 해가 2005년. 

휴스턴에 개인 사무실을 열자마자 한국 기업의 전담변호사로 일하게 되면서 30년만에 한국과 한국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계기가 안변호사에게 만들어진다. "그때 삼성, LG, 대우, 한국가스공사  등 굴지의 한국기업과 만나게 된 기회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또박또박 우리말로 대화하는 실력도 예전에 이미 멈추고 말았을 것"이라는 안 변호사는 서류상의 언어를 한국 법전언어로 번역하고 옮기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며 4년을 한국기업과 협업하며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게 쌓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4년 동안 비행기로 다닌 거리가 지구를 몇바퀴나 돌았는지를 헤아릴수 없을 정도라며 "한국기업이 주로 발을 딛는 카타르와 두바이 오만 알제리 등 주로 중동 아시아를 많이 다니면서 돈도 그때 가장 많이 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4년 동안 했던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했던 계기가 바로 '가족과 늘 함께 하지 못하는 외로움' 때문이었다는 안 변호사는 "당시 세살 난 딸이 너무 보고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돈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잊고 살았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자 미련없이 휴스턴으로 복귀해 지금의 자리를 고수하게 되었다고 피력한다.


남다른 ‘신앙과 봉사의 파수꾼’


 

 '연방검사출신의 형사변호사'로 오랜 시간 실력있는 법조인으로 지내온 것 이상으로 휴스턴 한인커뮤니티의 다정한 이웃으로 더 각인되고 있는 그의 이름 앞에는 '선교'와 '봉사'라는 수식어가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필자도 가끔은 그를 '안 목사님!' 이라고 잘못 부를 정도로 그가 하는 눈부신 사역활동은 부지런한 목회자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고도 남는다. 

일요일마다 세 곳의 교회(푸른교회, 동산감리교회, 휴스턴한인교회)를 빠짐없이 돌면서 아침 10시부터 11시 15분, 12시 40분에 우리말에 익숙치 않은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영어선데이스쿨의 성경공부를 도맡고 있는 것도 모자라 부흥과 전도, 간증사역을 명분으로 미주 전역과 캐나다, 중미에까지 수시로 순방하는 그에게 "도대체 변호사 업무는 언제 하느냐?" 질문도 종종 받을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시간을 잘 다스리며 본업의 업무도 진척있게 추진하는 기술을 한국 기업과 일하면서 터득하게 되었다"는 그는 자신을 거두어준 마이크 목사를 1년에 한번 정도는 만나면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은혜로 변호사 본업과 교회 사역을 조화롭게 병행해갈수 있도록 마이크 목사와 함께 기도로 응답받는다"고 자신있어 한다.

교회 사역의 선봉대에서 봉사하는 커뮤니티 단체에는 반드시 안용준 목사의 자선이 더불어 언급된다. 수년전 강주한(휴스턴비전교회 담임)목사의 노숙자들 한사람 한사람을 대하는 진정성이 틈 날때마다 지갑을 열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는 안용준 변호사의 통큰 봉사는 곳곳에서 실천되는 사역현장에서 그의 이름이 회자되고 또 회자된다.


“내가 죽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살았냐고 물을 때, 무슨 대답을 하나님 앞에서 해야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안 목사는 “죽을 때까지 지금 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이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면서 특유의 베시시한 웃음을 환하게 지어보인다.

불우한 환경의 약한 자를 배려하는 자세가  풍성한 신앙의 여정과 포개져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안용준 변호사의 행보가 휴스턴 한인사회 구석구석에 그가 바라는데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하기'를 소망해본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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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일요일마다 세 곳의 교회에서 우리말에 익숙치 않은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영어선데이스쿨의 성경공부를 도맡고 있는 안용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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