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김수미’란 여인을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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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김수미’란 여인을 떠나보내며
“‘그리운 것’은 이제 이 조카가 완성할게요”
김화례, 김화순 두 사람은 아주 아주 오래 전 운명하신 자매이셨다. 김화례 어르신의 장손은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필자이고, 김화순님의 여럿 딸 자식 중 한사람이 어제(10월 24일) 이른 나이로 돌아가신 배우 김수미(본명 김영옥)이다.
필자의 부친이 생전에 형제 친지가 없었던 탓이어서 그랬는지 고모(김수미)와는 아주 각별한 정분을 쌓으며 지냈던 추억거리가 수두룩하다. 나도 고모도 너무나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군산 금광동 말랭이(군산 사투리로 언덕배기)에 일곱식구의 장남으로 코흘리게 시절을 보냈던 필자는 군산 신흥동 말랭이에 살던 국민(초등)학생 개구진 고모를 틈만 나면 보러 가 실컷 놀고 난 뒤에, 해질녘 어둑해진 길을 터벅터벅 귀가했던 60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모와는 중학교를 서울로 유학해 숭의여고생이 되고 난 후에까지의 5년 간을 서로 못보고 지냈다. 아홉살 차이의 어린 내가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을 맞이했을 때 영옥이 고모는 초등생이 보기에도 세상에서 가장 이쁘고 매력적인 여자로 내 앞에 나타났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 조카와 고모가 나눠가질 수있는 최고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며, 해망동 공원이며 째보 선창에 은파 저수지까지 군산 바닥의 구석구석을 신발이 닳도록 다니며 추억을 쌓아 갔다.
그는 김수미란 예명으로 여고생의 교복을 벗자마자 배우가 됐고,
우여곡절의 긴 시간을 버티며 화려한 이력의 명배우가 되었으며,
배우로서의 정점의 시기에 가장 멋진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우리 서커스 구경갈까?"
난 고모가 불세출의 여배우가 됐어야만 했던 운명을 그 한마디에서 확신해왔다. 그닥 춥지 않았던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다시 서울로 상경해야만 했던 고모는 내 팔을 잡고 부두 가까운 공터에 대형 천막으로 지워진 서커스장으로 데려갔다. 드문드문 눈에 띄는 관중들 틈에서 그네를 뛰고 줄을 타는 사람들의 묘기는 우리 둘에게 그닥 흥미거리로 다가오질 못했다.
브라스 밴드의 반주가 요란하게 울려퍼지며 막이 오른 심파조의 막간 무대가 시작하기 무섭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은 ‘엄마와 아들이 전쟁통에 헤어져야만 했던 구슬픈 연기’에 혼을 쏙 빼 놓고 말았다. 고모는 나보다 더 심하게 가녀린 여인의 한서린 연기에 넋을 잃은 듯,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낼 생각도 안하고 두 손을 꽉 움켜쥐고서는 당장이라도 무대로 튀어올라갈 태세로 덤벼들었다.
'덤벼들었다'는 표현은 분명 그 순간 '고모는 뭔가를 결심한 게 맞어!'란 짐작을 들게 할만큼 강렬했었기에, 지금까지도 나의 그 표현은 추호의 의심없이 내 가슴에 굳어져 있다.
1986년 필자의 가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던 김수미(가운데)
내 짐작대로 고모는 당시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건지는 묻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김수미란 예명으로 숭의여고생의 교복을 벗자마자 탤런트가 됐고, 우여곡절의 긴 시간을 버티며 화려한 이력의 명배우가 되었으며, 배우로서의 정점의 시기에 가장 멋진 모습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필자는 김수미가 '여인으로, 배우로, 작가로' 시련을 겪던 '우여곡절'의 시기에 또 지난한 세월을 함께 보냈다. 필자가 극단 실험극장의 단역배우로 고단한 시절을 보내던 1980년대를 고모는 한 집안 식구로 거두면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만큼 더할나위 없는 힘을 보태줬고, 도곡동의 개나리아파트에서 고모가 가장 힘들게 활약하던 시절을 나는 매니저역으로 도움을 주면서 그렇게 또 1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 22년을 일용엄마로 연기했던 전원일기의 제1회 드라마 제목이다. 참으로 운명처럼 박수칠 때 김수미 배우는 사람들 곁을 떠났다. 운명처럼 그녀의 한 시절을 지켜봤던 조카는 비로소 할일 하나가 생겼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나만이 알고 있고 나만이 서술할 수 있는, 숨겨진 사연을 세상에 끄집어내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숨겨야 할 이유가 없는 보석같은 사연들이 가득한 것들이다.
아마도 세상에 내놓기에는 부끄러울 수도, 스스로의 입으로 꺼내기에는 겸연쩍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이게 오늘 취재수첩을 쓰고자 결심했던 이유다.
5년만에 고교생이 되어 만났던, 정초했던 큰 눈의 나탈리 우드를 닮았던 예쁘고 매력있는 모습에 반했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찬란하고 아름다웠고 당시에는 숨기고 싶어했던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그녀의 이야기를 이 조카가 시작하려고 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런 결단을 고모가 흐뭇하게 하늘에서 지켜볼 것이란 확신이 들기도 해서 크게 망설이지는 않으려 한다.
참으로 운명같은 얘기지 않은가? 김수미는 그녀의 첫 에세이집 제목을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라고 명명했다.
“고모! 이제 천국에 가서, 한번 터지면 좀체로 멈추지 못했던 웃음을 맘껏 웃으며 지내세요. 고모랑 유난히 친했던 김자옥, 김영애 배우와 지내시면서 종종 힘겨웠었던 짐들을 다 내려놓고서 마냥 행복한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운 것'은 이제 조카가 말하려고 합니다. 고모님의 완성되지 못한 명예를 이 조카가 마침표를 찍겠습니다.”
<임용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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