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신 여사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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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신 여사를 떠나보내며
'추억'이라는 이름의 동행을 기억합니다
서 사모님과의 아름다운 추억은 책으로 써도 한 권에는 다 담지를 못합니다.
나에게는 어머님이 두 분 계십니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어머님과 나를 바르게 성장하도록 길러주신 어머님. 나를 태어나게 해주신 어머님은 멀리 떨어져서 사셨기 때문에 서 사모님은 친정어머님을 대신해서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성장하도록 길러주신 어머님이셨지요.
14년전, 노인회관에서 수채화 반을 시작한 지 한달 만에 사모님이 저를 찾아 오셨지요. "나 한테는 수채화반이 있다는 걸 왜 안 알렸어?" 하시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 아까운 한 달을 놓쳐서 어떡해!”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처음 만나게 된 서 사모님의 모습은 우아하시면서도 강직하시고, 똑 부러지면서도 순수했던, 어찌보면 우리들 나이로 착각할 정도로 화끈한 면면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얼마 안 된 수채화반은 한창 자리잡는 과정이었고, 내부적으로도 불협화음이 종종 일어나고 있을 때였죠. "누가 누구를 싫어해서 수채화반에 안 나온다. 그리고 지도하는 선생이 맘에 안 든다”는 등등 나를 지목해서 몇몇 사람들이 비난을 해댈 때 어찌할 바로 모르고 괴로워하는 내 곁에 다가와서 “선생님! 이렇게 여리고 순진해서 큰일났네!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 꼬! “하며 나의 볼을 톡톡 만지며 다독거려 주셨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서 사모님의 그런 핀잔섞인 충고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우리 사랑하는 반원들과 함께 수채화반을 이끌어나갈 수가 있었을지 그 점엔 자신이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멋지고 화끈하셨던 사모님! 슈퍼우먼 사모님은 저희들 곁에서 항상 그렇게 ‘본’을 보여주셨고, 사모님이 우리 곁에 게셨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에겐 크나큰 ‘행운’이 된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서 사모님이 항상 그리울 거예요. 수채회반 첫해 전시회를 노인회관에서 했을 때, 음악을 하는 제 작은 아들이 재즈 그룹을 어스틴에서 이끌고 와 전시회 초청장 타이틀도 ‘재즈와 함께”로 붙인 적이 있습니다. 전시회를 여는 리셉션에서 연주가 끝났을 때 당시 생존해 계셨던 서 박사님께서 그룹 한명 한명에게 수고한 팁이라며 넉넉하게 용돈을 쥐어주셨지요. 당시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아들과 아들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또, 큰 아들이 여자친구라고 지금의 며느리를 데리고 왔을때, 전시회를 마치고 음식점으로 초청해 “여자친구 테스트를 내가 해야겠다”면서 서 박사님과 사모님, 우리 부부, 아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자친구를 여기 저기 관찰하시고 난 뒤 “선생님 집에 복을 가지고 올 사람이야! 복댕이 며느리감이니 두번도 생각지 말어!” 하시던 추억이며, 사모님의 큰 아드님인 목사님이 워싱턴에서 오시면 어머님께서 수채화반을 애지중지하심을 알고 수채화반 회원 모두를 멋진 음식점으로 초대해 힘을 북돋워 주셨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납니다
몇년 전부턴가 수채화반 전시회 중에 우리는 ‘사모님이 5년만 더 젊으셨으면”하는 희망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점점 연로해가시는 모습이 언제부턴가 눈에 띄기 시작했던 것이죠.
결국 마지막 전시회에서 저희는 뭔지 모를 ‘허무함’ 같은 게 밀려왔습니다.
결국 병원에서 뵌 서 사모님의 모습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네요 어스틴에서 내려 올 적마다 시간을 좀 더 쪼개서 사모님을 방문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어마어마하게 안타깝고 후회가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사모님을 이렇게 보내드려야 하는 게 가슴이 찢어질것 같이 아프고 슬프기만 하네요.
서 사모님, 아니 어머님, 제가 살아있는 날까지 나의 가슴속 깊이 나의 어머니로 영원히 간직하고 기억할게요.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지내시기를 기도하며 제 사랑을 어머님께 바치겠습니다.
제 어머님이 되어주셨던 지난 날들을 결코 잊지 않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이병선 드림
이병선 화백
그때 처음 본 사모님의 모습은
우아하시면서도 강직하시고,
똑 부러지면서도 순수했던, 어찌보면
우리들 나이로 착각할 정도로
화끈한 면면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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