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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 부인 두고 혼자 오라는 전보와 달리 몰려든 환영 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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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16)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 말미에 겨우 매달려 있는 듯 보이는 한반도. 그래서인지 우리의 5000년 역사는 줄곧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방어전을 치러야 했다.  북쪽의 거란, 여진, 몽고, 청나라, 그리고 남쪽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대적할 물리적 힘이 모자라니까 정신적으로라도 하나로 뭉쳐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어서인지 우리나라는 유난히 민족적 정체성이 강하다. 흰 옷을 즐겨 입어 붙여진 백의민족으로 시작하여 단군 신화에서 환웅이 배달(밝음을 비추는 동녘 땅)에 웅지를 틀었다하여 배달민족, 한반도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하여 한민족, 한 핏줄을 타고났다하여 단일민족….  


이들을 한데 버무리면 국수주의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이러한 배타성은 타향살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와이 노동자들은  다른 민족과 피를 섞는 국제결혼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현지 미국여인과의 결혼 역시 법으로도 금했다. 그만큼 인종차별이 심했다는 증거. 그러나 하와이 정부는 결혼이민은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진신부 제도가 이 때부터 생긴 것.  


가난한 집안에 먹는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또는 지상낙원이라는 하와이에 가보고 싶어서, 아니면 미지의 세계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 싶어서 …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한국 처녀들이 사진 한장만 보고 속속 하와이로 들어왔다. 항구로 마중 나와 이들의 목에 레이를 걸어주는 남자가 사진과 생판 다른 추남이라 할지라도 돌아설 곳이 없다. 운명이려니 여기고 참고 열심히 살아야지. 그리고 <대한부인구제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모금 활동을 벌이며 독립 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이승만이 파란 눈의 외국여인과 국제결혼을 했다는 것. 하와이 한인들에게는당연히 못마땅한 소식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을 아끼는 하와이 동지회 간부들은 이승만에게 연락한다. <하와이에 오려거든 먼저 당신 혼자만 들어와 국제결혼을 하게된 경위를 말해 주시오.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면 동포들이 외면할 것이니…>  1934년 10월 8일에 결혼식을 치뤘는데 혼자만 오라는 전보는 10월 23일과 25일 두 번에 걸쳐 보내 왔다. 


이런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이승만이 아니다. 한 고집하는 그는 이듬해 1월 24일에 유유하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물론 Fanny 를 데리고. 그런데 하와이 교민들도 소식은 그리 전했지만 이승만이 데려온 신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누를 길이 없었나보다. 무려 천 여 명의 교민들이 몰려 나와 이들의 목에 레이를 걸어 주며 대대적인 환영회를 베풀었다. 


이들이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돌려가며 초대해서 한국음식을 소개했다. 프란체스카는 이 때 김치와 고추장을 처음 맛보았다고 회고한다. 김치도 맵지만 고추장을 맛 보았을 때는 입안에서 폭탄이 터지는 느낌이었다고. 이들에게서 김치와 고추장 담그는 법을 배워 신혼 때부터 줄곧 김치를 담아 유학생들에게 퍼주기까지 했다고.  


우남은 결혼식 때 신부가 한복을 입기를 원했단다. 그래서 친정에서 가져 온 흰 천으로 둘러리 서 줄 남궁염씨와 같이 한복을 만드느라 다 잘랐는데 실패. 옷감만 버리고 웨딩 드레스를 입었다고. 이 부부의 전기를 보면 결혼생활에서 국적이나 문화의 차이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 같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보충해 가면서 조절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인 듯 느껴진다.        

   

미국에서 20여년을 생활했지만 한국 양반가의 6대 독자로서 몸에 배인 가부장적 기질은 떨쳐낼 수가 없었나보다. 신혼 초부터 이박사는  ‘자고로 한국의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들은 프란체스카 역시 ‘우리나라에서도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엌일을 도움받지 않는다’고 응수하며 행복해 했다. 


비엔나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결혼한 후 이박사는 활동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 DC로 옮겨 동북부를 중심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하루는 뉴욕에 들렀다가 워싱턴 DC  Press Club에서 연설할 예정이었다.  뉴욕에서 워싱턴 DC까지는 약 230마일이니까 자동차로 4시간 남짓 걸린다. 시간이 촉박했다.  


우남은 과속으로 엑셀을 밟았다. 대낮에 불을 켜고 신호등도 무시하며 질주했다. 드디어 모터사이클을 탄 경찰 둘이 따라붙었다. 새파랗게 질린 옆좌석의 프란체스카는 절규하듯 소리를 높혔다. - 여보, 경찰이 따라오잖아요. 제발 속도를 줄여요. - 뭐, 경찰? 백 미러로 경찰을 확인한 우남의 혼잣말  - 지금 잡히면 프레스 클럽에 제 시간에 못 들어가니 더 쎄게 밟아야겠군.      


경찰을 따돌리고 겨우 제 시간에 맞춰 강단에 설 수 있었다.  곧 연설이 시작되었다. 한발 늦게 따라온 경찰 둘은 아무리 그래도 연사를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릴 수는 없었다. 연설이 끝나는대로 연행하기로 마음 먹고 입구를 지키면서 그 과속 운전자의 연설을 억지로 들을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이 왜 독립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 정연하면서도 힘찬 열변에 매료된 청중들은 그의 말이 끝날 때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체포하려고 기다리던 두 명의 경찰들 역시 자기들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드디어 연설이 끝나자 감동한 경찰은 우남에게 수갑대신 V자를 날리고 프란체스카에게 한마디 하곤 떠났다. - 교통 경찰 20년 동안 속도 위반하는 운전자를 따라잡지 못한 것은 딱 한번이요. 바로 오늘, 당신 남편.     


그 일을 계기로 프란체스카는 남편 차의 운전대를 대신 잡았다. 남편은 그렇게 과속으로 달렸어도 티켓 한 번 받지않은 무사고 운전자임을 자랑했지만 더 이상 믿고 맡길 수가 없었다. 이로써 프란체스카는 아내이면서 자신의 주특기인 타이핑 번역 통역 기술을 겸비한 비서였는데 그 위에 운전사 노릇까지 떠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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