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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나의 인생, 나의 목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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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신대학에 73학번으로 입학, 군목 후보생 합격


필자는 아버지 이상욱 장로(80세를 일기로 지난 2008년 8월에 돌아가심)와 어머니 진희섭 권사(현재 92세로 김제에 살고 계심) 사이에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에서 1954년 12월 4일(음력)에 장남으로 태어 났다. 


어린 시절부터 4형제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독실한 신앙을 갖고 계셨던 부모님의 권유와 충고로 목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 들였으나, 1970년도에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되자 필자는 목사가 되는 것이 싫어서 부모님에게 반항을 하면서 몸부림을 친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필자가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시골 교회의 목사님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너무 가난하게 사실 뿐만 아니라 교인들로부터 여러 가지로 많은 말들을 듣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은 방황하는 삶이었으며 부모님에게 반항을 하면서 교회의 장로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법조계의 판사가 되든지 아니면 중고등학교의 국어 선생이 되려고 몸부림을 쳤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필자를 향해서 한번 작정하신 일을 멈추지 않으시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73년 2월에 시골 교회(김제 황산교회, 예장 합동측, 김제노회 소속)에서 부흥 강사로 서기행 목사님(당시 서울 대성교회 담임 목사)을 모시고 심령대부흥회가 월요일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6일 동안 있었는데, 필자도 그 부흥회에 참석하여서 첫날 첫 시간부터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었고, 부흥 강사 목사님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회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이런 서원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부족하고 연약한 종을 주의 종으로 불러서 세워 주신다면, 일평생 동안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복음만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면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렇게 서원 기도를 한 후에 필자는 부흥회 마지막 날 김제에서 전주로 이동을 하여서 부흥강사 목사님이 서울로 올라가시는 같은 차편에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서 서울로 올라갔다가 총신대학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73학번으로 합격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대학 1학년 때에 군목 후보생 시험을 약 3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보았었는데 그 중에서 총신대학에서는 7명만이 합격을 하였었다, 군목 후보생 합격자 명단에 필자도 함께 들어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총신대학에서 4년 동안을 꾸준히 공부를 하고, 총신대학 신대원에 올라가서 또 3년 동안을 신학을 공부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댓가로 졸업반 때에는 최낙재 교수님의 조교로도 일을 하게 되었었고, 또한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열매로 인하여 두 학기 동안 장학금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7년 동안의 모든 학교 과정들을 다 마친 후에 필자는 1980년 2월 25일에 예장 합동측 함남 노회에서 윤두한 목사와 함께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필자는 그 해 4월에 광주 보병학교에 내려 가서 동료들과 함께 약 3개월 동안을 특간 37기로 훈련을 받게 되었고, 7월에는 한 달 동안 성남 행정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고서 그 해 8월 1일부로 대한민국 육군 중위 계급장을 달고서 보병 제 20사단인 양평으로 배치되었던 것이다. 그 부대에서 필자는 처음 2년 동안은 포병 연대에서 4개 대대를 둘러 보면서 목회 사역을 하였었고 나머지 1년 동안은 사령부로 옮겨서 사령부에 있던 단결군인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었다. 그 어간에 필자는 간호 장교로 일하고 있던 현재의 아내를 군에서 만나게 되어서 1982년 10월 30일에 28살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을 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내를 통하여 첫째 아들을 1983년 8월 14일에 주셨고, 둘째 아들은 1985년 8월 24일에 주셨던 것이다. 군에서 3년 동안을 이렇게 사역을 하다가 필자는 1983년 7월 31일부로 제대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 장성중앙교회에 부임, 치료차 미국으로 이민

 그 후로 필자는 1983년 10월부터 한석지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동암교회의 부목사로 들어가서 사역을 할 수가 있었고, 그 후로 7개월 만에 그 교회를 사임을 하고서 1984년 5월 첫 주일부로 서울 노량진에 위치하면서 예장 합동측 서서울 노회 소속이었던 장성중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30의 젊은 나이에 그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을 하고, 젊은 시절인 30대의 나이 때인 약 11년 동안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속에서 장로님들 두 분이 계시는 그 교회에서 당회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숙지할 수가 있었고, 설교하는 일이나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일이나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 일, 성도들과 만나서 상담을 하는 일이나 심방하는 일, 권사님들과 여자 집사님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 나갈 것인가? 교회에서의 행정, 재정 관리, 인간 관계, 기도 생활 등등 여러 가지 것들을 섭렵하면서 많이 배울 수가 있었다.


11년 동안의 사역들 가운데 특히 청년들을 지도하기도 하였었는데, 그 때에 가르쳤던 청년들 중에서 3명의 목사들이 배출이 된 것이 너무나도 크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이 3명의 청년들이 목사가 되어서 지금은 둘은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고 있고 한 명은 안산에서 교회를 개척하여서 목회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렇게 열심히 젊음을 태우면서 헌신적으로 목회를 하다가 필자의 몸의 왼쪽 무릎에 관절염이란 심한 질병이 찾아 오는 바람에 필자는 가슴이 아프지마는 1995년 3월에 그 교회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교회를 사임한 이후에 필자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1995년도에 미국으로 들어와서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메디칼 센터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휴스턴에서 자리를 잡아서 1996년도 10월에는 총신 신대원의 어느 선배 목사님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받게 되었고, 1997년도에 두 번에 걸쳐서 휴스턴 메디칼 센터에 있는 벤탑 병원에서 양쪽 고관절에 인공 관절을 넣는 대 수술을 받게 되었었고, 1998년도 2월에는 역시 휴스턴 메디칼 센터에 있는 메도디스트 병원에서 왼쪽 무릎에 인공 관절을 넣는 대 수술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3번에 걸쳐서 대 수술을 받은 이후에 필자는 평소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지내게 되는 건강의 복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게 되었던 것이다(계속).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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